Marcin Sacha
Photography
Tuscany
어떤 나그네
옛날의 책갈피에 눌린 이름 모를 들꽃처럼
묵은 책을 넘기다 발견하는 경이로움으로 가끔
로사수녀를 생각한다.
그녀를 생각하면 그녀가 읽던 <內心樂園>이 떠오르고
그녀가 그린 미묘한 연필화 한 점이 떠오른다.
쫓아오는 굶주린 늑대, 도망치다 간신히 나무뿌리를
부여잡은 나그네, 구덩이 밑에서 또아리를 틀고 앉아
혀를 날름거리는 독사, 한줄기 잡은 뿌리를 갉아먹는 벌레들,
잎에서 얼굴 위로 떨어지는 몇 방울의 이슬....
30대 젊은 나이에 경험을 넘어 인생을 철저히 관구한 그녀의 그림은
지금 생각해도 심장이 저릴 정도로 놀랍기만 하다.
이것은 불교의 열반경에 나오는 나그네 이야기의 패러디다.
나는 당시 열반경에 대해 알지 못했고, 일찍부터 쇼펜하워와
키르케고르에 경도되어 삶과 우호적이지 않았다.
<공포와 전율>은 먹지 못할 시루떡- 첩첩한 긴 이론과 서술에도
불구하고 철학자가 제시한 <失足>은 두통제로 해결되지 않았다.
로사수녀는 그런 나를 실상의 직관 -그림 한 장으로 우둔과 안개를
단번에 뚫었던 것이다.
톨스토이 참회록에 나오는 열반경의 나그네 이야기를 옮겨보겠다.
♣ 나는 하나의 행위에 대해서도, 나의 인생 전체에 대해서도
아무런 이성적인 의미를 부여할 수가 없었다. .....
인간은 생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만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도취에서 깨어나면 모든 것이 허망되고 그나마도 어리석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 그것은 다만 잔인하고 어리석을 따름이다. .....
♣ 광야에서 미친 짐승에게 쫓기는 나그네의 이야기가 나를 사로잡는다.
짐승을 피해 나그네는 마른 우물 속에 뛰어든다. 그러나 우물 아래서는
그를 삼키려고 큰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다. 그래도 나그네는 짐승이
무서워 우물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우물가에 자란 야생의 넝쿨에 매어달렸다.
그는 힘이 다해 위와 아래서 그를 기다리고 있는 파멸을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넝쿨에 매달려 사방을 살펴보니 흰 쥐와 검은 쥐가 넝쿨을
갉아먹고 있다. 그는 당장에 독사의 입으로 떨어질 것만 같아 목숨이 다했음을
느꼈다. 그러나 그 넝쿨 잎에서 몇 방울 꿀이 혀에 떨어졌다.
♣ 이처럼 나도 나를 짓찧는 죽음이라는 독사를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삶이라는 가지에 매달려 있다. 그런데 내가 왜 이런 곤경에
빠져있는지 알지도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지금까지 나를 위로해준
꿀을 빨아먹으려 한다. 하지만 이 꿀은 이미 나에게 기쁨을 주지 못한다.
그런데 흰 쥐, 검은 쥐는 내가 매달려있는 넝쿨줄기를 갉고 있다.
나의 눈에 비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독사와 두 마리의 쥐로서 거기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다. .....
이것은 의논할 여지조차 없는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다.
독사의 무서움을 부정하고 생의 기쁨을 생각해온 지금까지의
기만은 더 이상 나를 속이지 못한다. .... 생각하지 말고 그저 살라고
제 아무리 말해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너무나 오랫동안
그렇게 살아왔기 때문이다. 이제 나는 나를 죽음으로 이끌어가는 나날을
지켜보지 않을 수 없다. 나에게는 그것만이 보일 따름이다.왜냐하면 그것만이
진실이기 때문이다. 그밖의 모든 것은 허위이다.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나의 잔인한 진리로부터
눈을 돌리게 한 몇 방울의 꿀-가정에 대한 사랑과 내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저작에 대한 사랑- 이것은 나에게 있어 이미 달콤한 것은 아니다.
<참회록 제 4장>
물론 이 장면은 열반경에 나오는 인간생활의 어리석음을 말해주는 비유이며
나그네는 우리 인간이고 우물은 가정이다. 맹수는 죽음의 신이다. 그것은
인간에게는 무서운 것이기 때문에 이 무상을 벗어나기 위해 인간은 도망친다.
독사는 인간의 몸을 구성하고 있는 地, 水, 火, 風의 사대(四大)이다. 벌끌은
오욕향락과 애욕의 세계이다. 그 때문에 인간은 무상을 잊고 죽음을 잊고
있는 것이다. 넝쿨은 평균 70년의 인생이다.
흰 쥐와 검은 쥐는 밤과 낮을 가리킨다.
인간이 과학의 힘으로 우주를 정복한다고 해도 인간은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이 우화를 통하여 무상 공포의 인생에 대해서
마음의 눈을 뜨라고 한 것이다.
톨스토이는 그의 만년에 부처님의 가르침에 가장 큰 감동을 받았다고
그의 <참회록>에서 말하고 있으며 특히 열반경에 나오는 이 우화가
인생관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발췌: 불교와 서구사상 / 민희식>
인터넷이 먹여주는 통조림 지식의 범람을 벗어나
이렇게 촌스럽게 긴 글을 옮긴 이유를
당신은 이해할 것이다.
어둠 속에서 구덩이나 절벽을 바라본 당신,
문을 잠그고 홀로 겨울을 견디는 당신,
잘못 든 길의 지도를 들여다보는 당신에게
<나그네>의 이름으로 그의 이야기를 바친다.
2010. 1. 20 글 크레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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